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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참고자료 모음/신화와 역사]
이 땅에 '사람'이라 불리는 생물이 나타난 이후 과연 몇천 년의 세월이 흘렀을까?
그들은 이 땅에 처음 생겨났을 때 신비한 존재들과 더불어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사람'은 신비한 존재에 대한 겸손을 잊고 스스로의 힘에 취하기 시작했다. 이제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사람'은 돌을 쌓아 성을 세우고, 숲의 나무들을 베어내 집을 넓히며, 자신의 힘만으로도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신비한 힘을 경외하기는 커녕 그것을 두려워하며 쫓아내려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신비한 존재들을 없애버리는 일은 물론 그들을 쫓아내는 일조차 불가능하다. 신비한 존재들은 자신들이 원할 때 원하는 장소에 나타나며, 스스로 원할 때에만 사라질 테니까.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는 변경 마을에서의 생활은 힘겹다.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땅은 척박해서 농작물도 풍성하게 열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근근히 농작물을 재배하고 비쩍 마른 소와 말을 돌보는 데 여념이 없다. 집들은 판자조각을 모아서 벽을 세우고 그 위에 짚을 얹어 놓았을 뿐인 오두막이고, 길들은 그저 자주 걷다 보니 생긴 산길이어서 비라도 한번 뿌리면 흙탕물이 흘러가는 시내가 되고 만다.

하지만 아무리 빈궁해도, 마을 안은 안전한 편이다. 한 발짝만 마을 밖으로 나가도 벌써 그 곳은 이상한 존재들의 땅이지, 사람들이 발을 들여 놓을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을 입구에는 집들의 빈궁함과는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문이 있고, 튼튼한 울타리와 마른 해자가 마을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다. 촞연적인 존재들 앞에서는 이런 장치들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사람들은 두려움 때문에 이렇게 몇 겹의 방어벽을 만들어냈다. 사실, 늑대나 도적으로부터 마을을 지키는 데 이 방어벽은 충분히 제구실을 하고 있기는 하다.

"자아, 자, 여러분 이 옷의 원단을 봐주세요. 이건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싸구려가 아닙니다. 잠깐, 거기 있는 처녀, 이리 좀 와봐요. 자, 어때? 처녀처럼 예쁘게 생긴 사람이 이 옷을 한번 입어봐요. 동네 총각들 다 상사병 걸려서 밤에 잠도 못 잘걸? 아니, 처녀가 아니라 애까지 있는 아줌마라고? 에이, 거짓말이겠지! 누가 이 얼굴을 보고 아줌마라고 하겠어? 그리고 남편이 있으면 더더욱이나 이걸 사 가야지. 이걸 입고 남편한테 보이면 너무 예뻐서 남들이 볼까 봐 꼭꼭 숨기려고 들걸!"
" 아니, 이 벌레 먹은 당근 좀 봐요. 이런 걸 팔면서 그래, 5백 원이나 받아 챙기려고 그래? 이거 왜 이래, 내 눈은 구멍만 뚫려있는 줄 아나본데."

오늘은 한달에 한번 열리는 장날이다. 장바닥에 물건들을 늘어놓고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장사치들의 물건을 근처 농가의 아줌마들과 남자들이 들여다보면서 흥정을 하고 있다. 그런 노점상 앞에서 일부러 아닌 척 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곁눈질 하고 있는 아줌마들. 사고자 하는 물건이 정해졌다고 그것으로 일이 끝나는 것은 ㅇ니다. 여기저기서 장사꾼과 손님들이 값을 흥정하는데 여념이 없다.
그런 사람들 속을 아이들도 덩달아 뛰어다닌다. 모처럼 곡예단가지 와서 여자들이 춤을 추고 남자들이 불을 뿜는 묘기를 하기로 되어 잇는 것이다. 평소에는 일에 쫓기며 사는 남자들도 오늘은 손을 놓고 구경을 나왔다.
그런데 이렇게 활기에 찬 길바닥에도 이상한 존재들은 여기저기에서 모습을 보인다. 저쪽 길모퉁이에서 손님도 없이 혼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남자, 그 남자가 푹 뒤집어쓰고 있는 후드 안쪽을 잘 들여다 보자. 짧지만 뿔이 나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는 아이들 무리를 자세히 살펴보자. 다들 얼굴을 알고 있는 근처의 아이들이다. 그런데 마지막에 있는 저 아이는 어느 집 아이더라? 저 아이만 왠지 귀고 뾰족해 보이지 않는가? 자, 당신의 어렸을 적을 회상해보라. 그 무렵 당신은 어디에서 왔는지 잘 알지도 못하는 아이하고 어울린 적은 없는가?
뉘엿뉘엿 해질 무렵이 되면 슬슬 이상한 분위기가 풍기기 시작한다. 밤의 장막이 내리면 안전하다고 믿었던 마을 안도 이제는 인간의 지배에서 벗어나버린다. 사람들은 집 안에 틀어박혀서 요물들을 보지 않으려고 서둘러 잠을 청한다.
밤은 요물들의 시간이다. 한낮에는 농가의 아줌마들이 장사꾼들과 흥정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던 이 거리도 지금은 요물들이 활개를 치는 장소가 된다.
오랫동안 병을 앓고 있던 촌장의 딸은 오늘밤이 고비라고 한다. 주술사가 푸닥거리를 하고 가족들은 신에게 기도하고 있다. 오빠들은 듈라한이 집에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마을의 문을 잠그고 모퉁이마다 횃불을 밝혀서 밤의 어둠을 쫓으려는 허무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집안 사람들이 아무도 잠을 자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평소에는 몰래 청소를 해주는 퍼크들도 도무지 나올 수가 없다. 빛은 어둠을 쫓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마을 밖에서 들려오는 저 통곡소리는 무엇일까? 저것은 처녀의 죽음을 탄식하는 반시의 소리가 아닌가.
아버지는 당황하며 그 소리를 멈추게 하려고 문을 여는 순간 미지근한 물벼락을 맞았다. 이상한 비린내에 얼굴을 찌푸리며 눈을 뜨자, 그곳에는 목잘린 남자의 그림자가 있었다. 옆구리에 안고 있는 목은 소리 높여 웃으며 말을 달려 사라져버렸다. 남아 있는 것은 절망에 쌓인 아버지와 ㄷ욱 더 목청을 높여 우는 반시의 울음소리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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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31 18:27 2008/07/31 18:27